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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퀘스트

[컨퀘스트/단편 소설] 네펜데 1부 - 대가(The Price) -3-

by 드렁큰미니어처 2024. 4. 30.

본 번역은 제가 진행한 것이 아니며, 미니어처 마이너 갤러리 august21 님의 번역을 기반으로 일부 용어를 통일하고 문장 중 일부를 수정한 것입니다.

 


 

창과 화살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다른 두 부대는 병사 수가 절반 이하로 빠르게 줄어들며 밀리고 있었다.
투구는 잃어버리고, 이마에서는 피가 강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헤르마크 대장은 소매로 얼굴을 닦으며 병사들에게 다시 대열을 갖추라 소리쳤다.

헌프리드는 자기 자리를 찾던 중 잉가를 보았다.
"잉가! 울릭 어딨어요? 그를 기준으로 서야하는데요."
그녀는 대답 대신, 무심코 등 뒤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울릭의 북방식으로 땋은 머리카락과 얼굴이 피와 진흙 속에 잠겨있는 모습이 보였다.
헌프리드는 다친 관자놀이를 공성추가 때린 듯한 충격에 어찌 반응해야할 지도 모른 채 마른 침을 삼켰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건 그저 대열에 서는 것 뿐이었다.
이젠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대열을 갖추는데 시간이 걸린 중장보병들이 아직 타 부대를 지원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남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프레드릭의 이름을 외치는 그 소리는 환호성과 뒤섞였다.
"군단이다! 군단이 왔다!"
헌프리드도 남쪽으로 돌아서서, 주위의 다른 사람들처럼 그 광경을 보고 환호했다.

기사들조차 부러워할 전신 판금갑옷을 갖춘 강철 군단이 완벽한 박자로 금속음을 울리며 행군하고 있었다.
그들의 어깨에 놓인 거대한 클레이모어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의례용 무기였겠지만 이 정예병들에게는 죽음을 연주하는 악기였다.

헌프리드의 시야에 들어오는 소대는 깃발이 없었지만, 날아오르는 아마텔룸 용(Armatellum Dragon)이 그들의 킬트에 큼지막하게 양각되어 있었고, 각 군단원의 견갑에는 군단 고유의 휘장이 새겨져 있었다.
헌프리드는 교전 명령이 떨어지는 바람에 구경하길 멈추었지만, 군단이 소리치는 것은 들을 수 있었다.

"강철은(Steel)!"
그들의 지휘관이 외치자,

"준비되어 있나니(PARATUS)!"
군단이 답했고, 습지는 그 목소리에 흔들리며 길을 열었다.

"끝났군." 
헌프리드 옆에 선 남자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승리는 우리 차지야, 안그러냐?"
헌프리드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분명, 승리는 우리 차지야.

그는 이제 옆자리가 된 잉가에게도 웃어 보였지만 그녀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그녀는 눈 앞의 전투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때때로 짜증을 내며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그들은 나머지 창병들이 있는 위치에 도달했지만, 이젠 최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젠장. 무슨 일이 일어난게 분명해. 저 소리 들었어? 그리고 융거네 석궁병들은 어디 간거야?"
그녀의 말에 헌프리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왕세자와 그의 기사들은 창병들의 전열을 부수려는 건지, 궁수들을 찾으려는 건지 다시금 돌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군단은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다.

헌프리드는 멀리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상한 소리가.

"또야!"
잉가가 말했다.
"저 소리 들려?  누가 우는 것 같은, 오 맙소사."

그리고, 그것이 나타났다.
헌프리드는 그것이 나타나는 순간을 보지도 못했다.

이제 그의 눈은 북쪽에서 달려오는 세 개의 야수(brutes)같은 형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그들의 측면으로 돌진해왔고, 하나는 쓰러지는 중이며, 다른 하나는 융거의 석궁병들에 의해 수십 곳이 구멍 나있었다. 그래봐야 별 차이 없어 보였지만.

그것들 중 둘은 각각의 팔에 중장보병들을 박살내기에 충분해보이는 거대한 공성추스러운 칼날달린 주먹 무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그는 멀리 남동쪽에 있는 또다른 3인조중 하나가 주먹을 올려치며 병사들을 가차없이 베어버리는 광경을 보았다.
약 15피트 높이의 공중으로 떠오른 한 남자는 그의 옆에서 날고 있는 석궁만큼이나 생기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강철은!"
뒤에서 또 한번 백부장(centurion)의 외침이 들렸다.

"맞서리라(HOSTIBUS)!"
우렁찬 대답과 함께, 군단은 검을 들고 돌격했다.

만약 저 야수들을 막을 자가 있다면 바로 저들일 거라고 헌프리드는 생각했다.
하지만 군단은 서쪽, 기사들의 후방을 향하여 돌격하고 있었다.
헌프리드는 마침내 그들의 목표물이 무엇인지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마치 기어다니는 것처럼 보였으며, 네 개의 다리가 부자연스러운 관절의 역겨운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진흙과 땅 속에 파고든 발톱달린 발은 그것이 질주하는 말보다도 빠르게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리는 짐승처럼 생긴 반면, 몸은 곤충처럼 생겼고, 복부와 흉부는 개미의 검은 갑각으로 덮여 있었다.
곤충형 머리는 목 위에서 비틀어져 있어 하악이 위 아래를 향하고 있었고, 앞을 향하고 있는 창백한 인간형 가면은 차갑고, 무감정해보였다.
흉부에서 튀어나온 통나무처럼 긴 팔을 뒤로 당긴 흉물은 잡초를 제거하는 도리깨처럼 기사들 위로 발톱을 내리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최초의 일격을 가한 것은 군단의 백부장이었다.
그는 포효하며 거꾸로 든 클레이모어를 휘둘러 혐오체의 다리중 하나에 구멍을 냈다.
그 일격은 그가 뒷다리에 짓뭉개지기 전에 잠시나마 괴수를 멈춰 세웠고, 덕분에 공격을 방해하는데 성공했다.
서둘러 지휘관을 따라 온 군단원들은 거대한 양손검을 쥐고 복수를 위해 흉물에게 달려 들었다.
누군가는 관절부를, 누군가는 뒤꿈치를 가격했고, 일부는 구멍이 뚫린 복부를 공격하기 위해 올라타려 했다.
다리에서 검은 액체와 연금술의 악취가 흘러나왔지만 혐오체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듯 했다.
그것은 발톱달린 손을 성가시게 구는 인간들을 향해 휘둘렀다.

헌프리드는 한평생동안 판금갑옷이 그토록 쉽게 잘려나가고 꿰뚫리는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순식간에, 그것은 진흙과 시체, 찢어진 판금갑옷이 뒤섞인 진홍색 웅덩이 위에 서있었다.
부드러운 세레나데 혹은 애가(lament)같은 작은 속삭임이 그의 몸 깊숙한 곳에서 메아리쳤다.
충격에 빠진 중장보병은 이 속삭임이 눈 앞의 죽음과 유혈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영혼이 저주받아서인지 궁금했다.

그 광경을 모두 목격한 한 기사가 군단을 돕기 위해 말머리를 돌리려 하자, 동료 기사가 그를 제지하며 북쪽, 그들의 왕세자를 묶어두고 있는 마지막 창병들을 가리켰다.
군단은 시간을 벌어주고 있었다.


기사들은 말에 박차를 가해 허리 굽은 일꾼(drones)들을 향해 달려드며 소리쳤다.
"길을 열어라! 잔당을 소탕하라! 왕세자님께 길을 열어드려라!"

본래라면 쉬운 일이었겠지만, 많은 중장보병들이 흉물과 야수를 보고 겁에 질려 달아난 탓에 헌프리드처럼 여전히 남아있는 자들은 몇 안되었으며, 야수들에게 붙잡혀 있는 터라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 인간이 어떻게 저런 괴물과 싸워...?"
잉가는 공포에 얼어붙은 채, 헌프리드의 옆에서 중얼거렸다.
헌프리드는 대답하지 못했으나, 군단의 두번째 부대가 동료들이 흉물을 잡아두고 있는 사이에 야수들을 쓰러뜨리며 이에 대신 답했다.


그는 군단원 두 명이 먼저 야수의 다리를 공격하는 것을 보았다.
야수가 무릎을 꿇자, 세번째 군단원이 노출된 목을 노려 머리를 도려냈다.
검은색, 보라색의 액체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며 주위 사람들을 적셨고, 타는 듯한 악취가 진동했다.
다른 네 명이 남아있는 야수에게 달려들어 두 명은 놈의 다리를 베었고, 한 명은 무릎 꿇은 야수의 칼날 주먹을 옆으로 쳐냈으며 마지막 군단원이 어깨 아래의 틈새를 찾아냈다.

이 작은 승리는 나머지 병사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한 줌밖에 안되는 중장보병들이, 왕세자를 흉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길을 개척하고 있는 기사들에게 달려가려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후퇴하라."

그 목소리가 장교의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으나 모두 그 명령에 따랐다.
무기를 떨구고, 어떤 이는 울부짖으며, 또 어떤 이는 알아서 자기 목숨을 챙기라 소리치며, 병사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헌프리드 옆에 있던 잉가도 똑같이 행동했다.
그녀는 크게 뜬 눈으로 중얼거렸다.
"다 끝났어."
헌프리드는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가 용맹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얼어붙었기 때문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그는 흉물이 왕세자에게 가지 못하게 막으려는 군단과, 둘 밖에 남지 않은 기사들이 몇 안남은 창병들을 상대하며 필사적으로 길을 열고자 하는 광경을 지켜 보았다.

그는 야수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붙잡힌 헌프리드는 땅에서 들어올려졌고, 변화한 높이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탁 트인 전망에 놓인 그는 주위에서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흉물은 최후의 창병들과 기사들, 그리고 말들을 단 두 번의 휘두르기로 베어 넘겼으며 그것이 지나온 길 뒤로는 짓이겨지고 불구가 된 군단원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한 기수가 필사적으로 말에 박차를 가해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헌프리드는 그 작은 승리에 정신을 놓은 채 힘없이 미소 지었고, 자신을 붙들고 있는 것과 눈을 마주쳤다.

그 야수는 뼈 갑옷의 등부분 가시에 박혀 있는 석궁병은 신경쓰지도 않고, 헌프리드의 얼굴을 바라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뼈 투구 속에 보이는 야수의 한쪽 눈은 손에 든 작은 남자를 향한 호기심과 단순한 지성, 그리고 광기로 반짝였다.
헌프리드가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실증이 난 야수는 그를 쥐어짜고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렇게 그의 세상은 어둠 속으로 희미해져갔다.



그는 눈을 감은 채 타는 냄새를 맡으며 깨어났다.


폐는 축축한 뭔가로 가득 찬 느낌이었으며 왼팔에서는 생각하는 것을 방해할 정도로 날카로운 통증을 보내왔다.
그가 기침을 하고자 입을 여는 순간, 무언가가 입 속으로 밀어 넣어졌고 화끈거리는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었다.
그는 숨이 막혔으나 액체는 계속해서 들어오며 폐와 위 양쪽을 가득 채웠다.
잠시 후, 그의 몸은 머리부터 발 끝까지 극심한 통증에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는 숨을 꺽꺽대며 눈을 떴다.

그의 옆에는 플라스크를 든 창병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리며 간절하고 복종적인 소리를 냈다.
그 너머에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으며 눈이 커다란 가면을 쓰고 있는 두 형체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둘 사이에는 마찬가지로 키가 크지만 위엄이 느껴지고 늘씬하며 갑옷을 입은 존재가 서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진짜 얼굴이라면, 그 자의 피부는 파랗고 창백한 회색에 암흑으로 가득한 아몬드 모양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자는 체격에 비해 머리를 작아보이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로브와 견갑을 착용하고 있었지만, 헌프리드는 고통과 경련으로 인해 자세히 보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그 자의 차분하고, 거만한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를 겨우 들을 수 있었다.
"너의 육신은 용도 변경되고 있다."

그 자는 텔리안 제국어로 선언하며 추가 설명의 필요성에 한숨을 내쉬었다.
"수정되다, 치유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네가 경험중인 부작용은 1시간 정도 지속될 것이다. 그동안 내 말에 집중하라. 너의 새로운 기능은 두가지 전언을 전달하는 것이다. 먼저, 네 왕자에게 이건 견본에 불과하다 알려라. 만약 그가 아비를 제거하고 왕위를 계승한다면, 상호 이익이 되는 무역 동반자 관계가 된다면 환영받을 것이다. 만약 그가 내게 자원을 헛되이 낭비하기를 추구한다면, 죽음 또한 내 주요 거래 품목임을 알려라. 너의 왕에게 위와 같이 전하여라."

그 자가 옆으로 손짓했다.
몸을 떨고 숨이 막히는 와중에도, 헌프리드의 눈은 그 손짓을 따라 움직였다.
그의 주위로, 무수히 많은 허리 굽은 괴물들이 전장에서 본 것과 같은 로브입은 형체들의 인도를 받아 인간, 첨탑 졸개들의 시체를 한데 모아 산더미처럼 쌓고 있었다.
시체들의 위로 검은 구름이 불쑥 나타나더니, 돛 대신 풍선을 단 배같은 것이 갈고리가 달린 밧줄을 내려 보냈다.

헌프리드는 배로 옮기기 위해 시체들을 갈고리에 매다는 모습을 보며 고통 속에 울부짖었다.
그 자가 위엄있게 돌아서서 떠날 때 남긴 마지막 말은, 헌프리드의 곡성을 뚫고 울려 퍼졌다.

"네펜데는 기억하리라. 나는 언제나 빚을 받아내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