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컨퀘스트

[컨퀘스트/단편 소설] 네펜데 1부 - 대가(The Price) -1-

by 드렁큰미니어처 2024. 4. 30.

본 번역은 제가 진행한 것이 아니며, 미니어처 마이너 갤러리 august21 님의 번역을 기반으로 일부 용어를 통일하고 문장 중 일부를 수정한 것입니다.

 


 

"천천히, 전진!"

 

부대 도처에서 안도의 한숨이 들리고, 기강이 잘 잡힌 발걸음과 장비가 덜그럭 거리는 소리는 발을 질질 끄는 소리, 철그럭거리는 불협화음으로 바뀌었다. 투덜거림과 중얼거리는 소리도 그 뒤를 따랐다.

 

구령에 맞추어 어두컴컴한 습지대의 진창길을 행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침묵 속에서 걷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헌프리드(Hunfrid)는 목을 돌리고 어깨를 약간 폈다.

사슬갑옷를 입고 걷는 것은 지옥같이 피곤했다.

 

"두번째야."

왼편의 울릭(Ulric)이 투덜거렸다.

"우리가 전진만 하길 벌써 두번째야. 마을의 늙은 프레다(Ol'Freda)는 두 번 일어나는 일은 세 번도 일어난다고 말하곤 했지. 내 말 명심해. 분명 또 일어날걸."

헌프리드는 이 북방인(The Norman)이 계속 목소리를 낮추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만 좀 징징대라, 이 덩치만 큰, 수염달린 겁쟁아."

뒤에서 잉가의 목소리가 그들의 귓가를 때렸다.

"우린 더 힘들고 긴 행군도 해봤어. 여기 불평하는 애새끼가 하나 있는 것 같지 않아? 아, 너 그냥 안개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구나."

 

울릭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은 가늘어져 있었다.

"그래 맞아! 너도 무서워하는게 좋을 거다. 너한테 눈치라는게 있다면 말이야, 이 계집년아."

그는 버럭 말을 내뱉었다가 금방 다시 조용해졌다.

 

헌프리드는 그가 자제심을 발휘하여 입을 다문 게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건 신중함이었다. 이 북방 출신의 고참병은 주위의 안개를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안개는 그들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신입 중장보병들(man-at-arms)도 예외는 아니었다.

안개는 그리 짙지 않았으나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안개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얼얼하고 화끈거리는 희미한 냄새가 났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간, 술을 들이켰을 때보다도 더욱 심하게 목이 따가웠다.

그러고나면, 칙칙한 안개는 색바랜 구름, 진주빛, 무지개 색으로 시시각각 변하여 주위에서 춤을 춰 그들을 유혹했다.

 

"네펜데*의 숨결(Nepenthe’s Breath)."

(역자 주* 네펜데=벌레잡이통풀.)

울릭은 목소리를 낮게 유지한 채 고집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게 바로 그거다. 안개가 아냐. 저주받은 첨탑(Spire**)의 마법이지. 이 숨결은 그 빌어먹을 것이 마치 살아있다는 것마냥 첨탑에서 나온다. 그리고 악몽으로 만들어진 괴물들을 숨기지. 이건 너희의 생각을 먹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너희의 친구들, 너희가 사랑하는 이들, 종국에는 너희 자신의 이름까지 잊게 만들거다. 첨탑군주들(Spirelords)이 가지고 놀기 좋은 껍데기만 남을 때까지 말이야. 거기 신참, 네펜데가 무슨 뜻인지 아나?"

**외계에서 넘어온 종족인 망명자들(Exiles)의 한 분파이자 그들의 구조물을 일컬음.

 

"제 이름은 에드슨(Edhson)입니다. 바츠담(Vatsdam)에서 왔죠."

젊은 중장보병이 싱긋 웃었다.

"여기서 수십 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죠. 전 당신이 말한 이야기들을 어렸을 때부터 들으며 자랐습니다. '네펜데'란 신화 속 망각의 과실입니다. 여기 사람들이 첨탑에 그런 이름을 붙인 이유는 과수에 열리는 육식성 꽃과 닮았기 때문이죠. 물론, 전 그게 숨쉬는 걸 실제로 본 적도 없고 보러갈 생각도 없지만요."

 

"봤지, 울릭?"

잉가가 뒤에서 끼어들었다.

"신참조차 너보다 아는 게 많은 데다 주정뱅이가 지어냈을 법한 이야기를 무서워하지도 않잖아."

 

"그렇다면 저 놈은 너만큼이나 멍청하다는 뜻이겠지, 잉가."

울릭은 빠르게 대답했다.

 

 

"지어낸 이야기든 아니든, 첨탑이 있는 땅은 저주받고 그걸로 끝이다. 갈라니아(Galania)에도 하나 있지. 이상한 이름인데, 사람들은 그걸 마귀할멈의 미소(Hag’s Smile)라고 부른다더군. 거기 사람들이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지 들은 적 있나? 2년 동안 가뭄과 역병에 시달리고 있다. 이제 3년 째겠군. 게다가 그건 쓰라린 바다(혹해, 酷海, Bitter Sea) 속에 있어. 깊은 물 속 아래에 말이야. 그 근처로 향하는 배들은 모두 사라지지. 어떤 이들은 첨탑이 고대 신들의 텅 빈 유물 혹은 작은 궁전이라고도 하지만, 그렇지 않아. 그 안엔 첨탑군주들이 살고 있다. 서쪽에 살고 있는 방직공들(Weavers**)처럼 말이지. 노드들은 첨탑군주들이 반쯤 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래, 한 때 위대한 나무에 군림했던 바니르(Vanir)의 뒤틀리고, 비주류이며, 저주받은 종류같은 거라고 생각하는거지."

**방직공들의 궁정(The Weaver Courts), 망명자들의 또다른 분파.

 

"아무리 너라도 너무 원시적인 이야기인걸, 울릭. 나무집에 사는 신들을 숭배하는 노드 놈들을 정말 믿는 거야?"

맨 앞줄의 남자가 말하자 주위의 모든 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난 노드가 아니다, 그로비치(Grovich)! 하지만 되고 싶긴 해. 네 어미같이 몰락해가는 폴마그(Polmags) 사람이 될 바에야 말이다. 네 아비에 대해선 더 캐묻지 않으마. 네가 알리 조차 없잖아."

 

이제 낄낄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건 그로비치 쪽이었다.

결국 폴마그인과 울릭 모두 웃었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captain)이 그들을 조용히 시키자 침묵이 흘렀고, 울릭이 다시 입을 여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이번엔 네 이야기는 어떠냐, 신참? 헌프리드 맞지? 텔리안(Tellian) 제국어 이름이구만? 귀하신 분 같아 보이진 않는데. 네 돈으로 산 서민들 감시라도 하러 왔나?"

 

헌프리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리스마크 사람(Riisman)입니다. 왜인진 몰라도 저희가 텔리안 제국어를 선호하는 편이긴 하죠. 반면 마케니(Markeni)는 트레이드텔어(Tradetell)를 선호합니다. 저흰 둘 다 배우긴 하지만요."

 

"난 너희 리스마크(Riismark) 출신들이 모두 같은 부족(clan)인 줄 알았는데."

 

"저희 식으로 말하자면, 맞습니다. 저희는 모두 명사수(Markmen)지만..."

 

남서쪽 방향에서 들려오는 발굽과 얕은 물보라가 튀는 소리에, 그는 입을 멈췄다.

모두가 몸을 돌려, 무기를 향해 손을 뻗거나 방패끈을 움켜쥐었다.

 

"진정하도록, 제군들. 계속 걸어."

그들의 대장이 말했다.

 

"기수가 하나."

뒤에서 잉가가 말했다.

 

"그래, 가벼운 말에 마갑이 없어. 정찰병이야."

울릭이 중얼거렸다.

 

잠시후, 안개 속 유령에 대한 전설처럼,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남쪽으로 질주하는 기수의 초상이 그들의 머릿속에 인상을 남겼다.

말의 땅을 내딛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멀어지고, 침묵이 흘렀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맹렬했던 불청객이 사라진 소리의 빈틈을 습지의 소리가 메웠으니.

도마뱀이 산들바람 속에서 속삭였고, 벌레들이 성가시게 윙윙거리는 동안 두꺼비는 두껍대고 멀리서 새들이 이에 답했다.

안개 속 어딘가에서, 뻐꾸기 한 마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불길하게 울부짖었고,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쁜 징조였다.

병사들 사이에 남아 있던 좋은 분위기는, 결국 사라졌다.

네펜데의 숨결은 그들의 얼굴을 암울하게 만들고 눈은 총기를 잃게 했으며 목소리는 침묵 속에 가두는 것으로 통행료를 받아갔다.

그들의 뒤에서 금속이 바람을 가르고 철그럭거리는 소리에 반쯤 가려진 목소리가 들려왔고, 6명의 기수들이 그들의 옆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헌프리드는 소음이 너무 커서 기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광경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들중 여전히 헐떡이고 있는 정찰병과 땀에 젖은 그의 암말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기수와 말 모두 판금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을린 금속은 잿빛에, 그들의 투구는 험악하고 섬뜩했다.

뿔이나 세공된 날개로 감싸인 고급스러운 진한 자주색 장식이 말의 움직임에 따라 춤을 췄다.

길고, 복잡한 기병창은 안장의 구멍에 끼워진 채 판금으로 감싸인 주먹이 꽉 쥐고 있었으며,

전통적인 글라디우스 칼자루가 달린 검이 허리춤에서 흔들렸다.

군마의 면갑은 가시가 달려 야만스러워 보이는 반면, 청동 장식은 주황색, 진홍색으로 번쩍이며 어두운 판금과 대비되었다.

단 한 명, 황금 장식인 기수를 제외하고.

대열의 한가운데서 달리는 그의 투구는 당당하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백수의 왕, 사자 모양이었다.

그는 부대에 경례 명령을 내린 대장이 자신들 쪽으로 몸을 돌리자 그 녹색 눈동자를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헤르마크(Hermark) 대장, 자네였군."

기수의 목소리는 친근했으나, 자신감에 차있었다.

"자네 병사들을 잠시 휴식시키게나. 사령관에게 가는 길이니, 내가 일러두겠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전하!."

대장은 기수들이 멀어질 때까지 경례를 유지하다 부대 쪽으로 돌아섰다.

"부대, 제자리에 서! 쉬어!"

 

"봤지? 이 성격 더러운 늙다리야."

잉가는 미소지으며 방패를 내려놓았다.

"멈추라잖아. 너의 늙은 프레다가 틀렸어."

 

"그래. 지금은 나도 그녀가 틀렸길 바란다."

울릭이 음산한 목소리로 답했다.

 

"기분이 별로겠구나, 에드슨."

벌써 앉아서 가죽부대의 마개를 뽑고 있는 그로비치가 말했다.

"기수가 우리쪽으로 달려오고, 최고 결정권자한테 갔는데 우리보고 쉬라고? 네가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다면 기분이 언짢을거야. 이건 전투 전에 우릴 쉬게 해주는 거니까."

 

"이젠 편집증 환자 다됐구나."

또다른 병사가 말했다.

"난 어젯밤 시중드느라 사령부에서 이야기하는 거 다 들었거든. 우린 그냥 순찰 중인거야. 운동 삼아서 말이야. 내기라도 걸까?"

 

"순찰? 그야 물론 순찰이겠지. 보병 3개 부대와 기사 6명이 어젯밤 군단과 야영지를 같이 쓰는, 잠깐만, 로드히(Rodhe)!"

울릭은 목소리를 높이며 다른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누군가를 찾는듯 두리번거렸다.

"우리쪽에 사수들(sharpshooters)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 그게 내가 두번째로 본 단어지. 융거(Junger)네 석궁병들(Crossbowmen) 몇 명이 오늘 밤 근무자 명단에 추가되어있는 걸 봤어."

 

"설령 그렇더라도, 여기엔 싸울 상대가 없잖아, 울릭."

잉가가 한 번 더 끼어들었다.

 

"아, 있잖나. 물론."

북방인은 음산한 목소리로 말하며,

"벌써 까먹은 건 아니겠지."

 

크게 웃었다.

머리가 희끗하고 경험이 많은 몇몇은 침묵했고, 그들의 노련한 눈동자는 불안하게 춤을 췄다.

 

"진심으로 하는 소린 아니겠지. 첨탑은 헛소문으로 가득 채웠을 뿐인, 텅 빈 껍데기라고. 거기에 귀신이나 마녀같은 건 없어."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고, 그때 헌프리드가 입을 열었다.

 

"왕세자셨어요."

그의 목소리는 쉬어있었다.

"브란덴그라드(Brandengrad)의 변경백, 프레드릭(Fredrik) 님이요. 오른쪽에 있던 기사는 그 분의 막내 동생이자 베스트브리지(Vestbridge) 전투 후에 막 기사 작위를 받은 빌렘프레드(Villemfred) 경이고요. 보통, 왕세자님이 순찰 임무에 직접 나오시나요?"

그가 물으며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돌아온 반응은 침묵과 당황한 면면들 뿐이었다.

 

"네펜데."

울릭이 악을 물리치는 점성술의 손동작을 취하며 말했다.